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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인지와 알렉산더 테크닉으로 다스리는 일상의 균형

알렉시시미아: 감정을 말로 못 하는 사람들과 몸의 신호

읽는 시간 약 6분

알렉시시미아 감정표현불능증을 겪는 사람들에게 “지금 기분이 어때요?”라는 질문을 던지면, 대개 “그냥 그래요”나 “잘 모르겠어요”라는 무덤덤한 대답이 돌아오곤 합니다. 이는 감정 자체가 결여되어서가 아닙니다. 자율신경계 반응으로 인해 몸에서는 이미 심장 박동, 근육 긴장, 호흡 변화 같은 신체적 신호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음에도, 이를 뇌의 언어 영역으로 연결하여 이름 붙이는 내수용감각(Interoception)의 다리가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임상 심리학과 정신의학에서는 이처럼 내면의 정서적 자극을 인지적 언어로 번역하지 못해 신체 통증이나 감정적 답답함으로 유발되는 현상을 알렉시시미아(Alexithymia), 즉 감정표현불능증으로 정의합니다. 왜 우리의 몸은 감정을 정직하게 느끼면서도, 정작 그것을 언어로 옮기는 데에는 실패하며 신체적 통증이라는 우회로를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요?

1970년, 정신신체 질환 환자들에게서 발견된 패턴

이 개념은 1967년 정신분석가 피터 시프네오스(Sifneos)가 처음 제안을 했고, 1970년 존 느마이어(Nemiah)와 함께 더 정교하게 다듬었습니다. 이들은 하버드 의대에서 소화성 궤양이나 만성 통증 등 정신신체 질환(스트레스가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는 질환) 환자들을 진료하다가 공통된 패턴을 발견했습니다.

이 환자들은 자신의 내면적 감정을 구별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데 뚜렷한 어려움을 겪었고, 상상하거나 공상하는 상징적 능력도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정서적 소통보다는 일상적인 사건이나 외적 사실에만 과도하게 집착하는 특유의 실용적 사고방식을 보였으며, 내면의 무의식적 갈등을 인지하고 다루는 능력 자체가 아예 발달이 덜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처럼 감정 언어의 부재가 곧 신체적 통증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이 임상적 연구를 통해 처음 체계화된 것입니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몸의 신호와 감정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오해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알렉시시미아를 겪는 사람들이 감정 자체를 못 느끼는 건 아닙니다. 심장이 빨리 뛰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배가 조여드는 신체 반응은 똑같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이 신체 반응을 ‘화남’인지 ‘기쁨’인지 ‘불안’인지 구분해서 이름 붙이는 능력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즉 감정과 신체 감각을 분별하는 능력, 학술적으로는 내수용감각(Interoception)이라 부르는 이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알렉시시미아 감정표현불능증

내수용감각: 몸 내부의 신호를 읽어내는 내면의 센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접근해보면 핵심이 되는 개념이 바로 내수용감각(Interoception)입니다. 이는 심장 박동, 위장의 움직임, 호흡의 깊이, 근육의 수축처럼 ‘내 몸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리적 상태를 뇌가 실시간으로 알아차리는 감각 체계’를 의미합니다.

정상적인 감정 처리 과정에서는 내수용감각이 몸의 미세한 변화를 인지하면, 뇌의 변연계와 전두엽이 이를 “지금 내가 불안하구나”라는 정서적 언어로 번역해 냅니다. 하지만 알렉시시미아 상태에서는 이 내수용감각 신호가 뇌의 언어 영역으로 매끄럽게 전달되지 않거나 왜곡됩니다. 결과적으로 몸은 분명한 신호를 보내고 있음에도, 당사자는 자신의 상태를 명확한 감정의 단어로 정의하지 못한 채 ‘원인 불명의 답답함’이나 ‘신체 통증’으로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게 정도의 문제라는 점입니다. 알렉시시미아는 있고 없고의 이분법이 아니라, 누구나 어느 정도씩은 이 스펙트럼 위에 있습니다. 유독 피곤하거나 스트레스가 극심할 때, 평소보다 감정을 언어로 옮기기 어려워지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 스펙트럼이 상황에 따라 움직인다는 걸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어화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역설

여기서 신체인지라는 관점으로 이 개념을 다시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질문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흔히 “감정을 정확히 언어화해야 건강하다”고 배웁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내가 느끼는 감정과, 그 감정에 붙인 이름이 항상 같은 것일까요. “나는 화났다”는 말이 실제 감정 그 자체인지, 아니면 그 감정을 나중에 해석해서 붙인 하나의 생각일 뿐인지는 사실 명확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상대에게 내 감정을 설명했을 때 내가 말한 의미와 상대가 받아들인 의미가 정말 같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도 어쩌면 착각일 수 있습니다. 언어는 감정을 정확히 옮기는 투명한 그릇이 아니라, 매번 어느 정도의 손실과 왜곡을 동반하는 번역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감정을 정확한 언어로 붙잡으려 애쓸수록, 오히려 그 감정에 더 붙들리게 되는 건 아닐까요.

지금까지 이 시리즈에서 반복해온 원리를 떠올려보면, 답의 방향이 보입니다. 몸의 긴장을 “이완해야 해”라고 힘주어 명령하면 오히려 더 굳어졌던 것처럼, 감정도 “이건 정확히 무슨 감정이지”라고 힘주어 규정하려는 순간 오히려 더 복잡하게 얽힐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 테크닉이 몸에게 요구하는 게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 ‘방해하지 않기’였듯, 감정에게도 정확한 이름표를 붙이는 것보다, 그저 지금 이런 신체 감각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굳이 이 느낌의 정체를 완벽하게 정의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지금 가슴이 조여든다”, “지금 몸이 뜨겁다”고 감각 그 자체에 머무는 것. 어쩌면 그게 언어화라는 다음 단계보다 먼저, 더 정직하게 나를 이해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게, 이 개념을 들여다보며 제가 얻은 생각입니다.

Editor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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